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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살기 위한 지식/죽기전에 꼭 알아야할 상식

비슷한 듯 전혀 다른 타이완 민주화과정(요약있음)

대만이라고도 부르고 (중국 공산당과 대립되는 의미로)자유 중국이라고도 부르는 타이완

일단 어디있는 곳인지 지도부터 투척



위치 상 날씨도 따뜻하고 살기 좋아 보이지만 역사는 그리 밝지 않다.

타이완의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절대로 쯔위사태 때문이 아니다


<서론>

타이완 역사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타이완 주민들의 정신적 지주인 '정성공(鄭成功 (Zhèng Chénggōng))'이 세운 '정씨 왕국'을 먼저 이야기해야하는데, 그 전에 정씨 왕국 이전을 설명하자면.

섬이라는 지리적 이점으로 인해 주변국가들이 철기에 이르기 전까지는 외부의 침입 없이 비교적(?) 소수부족이 서로 공생하며 평화롭게 지냈다.

중국 대륙에서는 춘추전국 때까지는 서로 싸우느라 바빠서 타이완을 '이주(吏州,오랑캐 땅)'라고 부르며 듣보잡 취급을 했다. 지금은 왜 못 먹어서 안달인가? 따라서 듣보잡 오랑캐 타이완 주민들은 바다를 이용한 중계무역을 하며 외부와 소통하기 시작했다.

타이완은 명나라 시기에 처음으로 스페인에게 해상무역의 거점으로 점거당하고 이후엔 네덜란드가 이내 명나라에서 도망(?) 온 정씨 가문이 통치하게 된다.

<정씨가문이 어떤 가문이냐면>

명나라 말기에 해상무역으로 크게 돈을 번 아버지(정지공)와 일본 세력가의 딸인 어머니(타가와) 사이에서 정성공이 태어난다. 정지공은 아이를 가진 타가와를 버리고 중국 본토로 돌아가 혼인을 하였기에, 타가와는 홀로 일본에서 정성공을 키웠다. 정성공이 7살이 되자 해상무역(이라쓰고 해적질이라 읽는다)으로 크게 성공한 아버지 정지공은 아들 정성공을 명나라로 데려온다.

어찌어찌하여 정성공은 (천한 가문의 콤플렉스에 기인한) 정씨 가문의 정당성을 얻기 위해 명나라에서 관직에 집착하였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명나라는 청나라에게 정복되어 갔고, 정성공은 살기위해서라도 타이완을 정복하게 되었다. 이때 네덜란드에게서 타이완을 빼앗아 정씨 왕국을 세우게 되었고 20년간 통치하게 되었다. 네덜란드가 심어놓은 사탕수수 농장 때문에 빨리 자립할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주민들에게 둔전법(땅을 나누어줌)을 실시하였고 정당성을 확보하게 된다. 물론 정씨 가문을 따라 들어온 한족에게 더 많은 땅을 주었기에 타이완선주민은 산으로 들어가 '고산족(高山族)'이 된다.

정씨 가문의 반청복명(反清復明) 노력에도 불구하고 청나라에게 타이완을 빼앗기고, 이후 청나라는 212년간 통치하게 된다. 한족이 빼먹고 몽골족이 빼먹고. 청나라는 외부 오랑캐와 무역을 제한하는 (침략을 막기위해) 해금정책을 폈기 때문에, 청나라 통치시기에 타이완은 강제적으로 자립갱생하게 된다. 역시 청나라는 생긴게 다르게 생겼다는 이유로 타이완 선주민과 명나라를 구성했던 한족을 구분해서 통치하였고 상대적으로 농업에 능한 한족이 땅을 많이 가지게 된다. 타이완선주민은 산으로 들어가 '고산족'이 된다.

정성공이 타이완에게 주는 의미는, 중국에게는 명나라 관리였던 사람이 다스렸던 나라로, 일본에게는 일본에서 태어난 사람이 다스렸던 나라로, 타이완만 빼고 서로 만족스러운 인물이다.

<일제강점기(강점 아닌 강점 인듯 강점같은)>

19세기 말 청일전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일본의 해군은 타이완선주민을 스파링 파트너로 사용한다. 이 과정에서 갑오농민운동이 있었다. 일본은 우리를 제2의 스파링파트너로 쓴다. 류큐 이후 제3의 스파링파트너 일라나 이후 일본은 중국에게 청일전쟁을 일으켜 정복하고 1895년 시모노세키조약을 맺는다. 이때 중국은 (멀쩡하게 자립하고 있는) 타이완을 일본에 내어준다. 3국협약따위 있거나말거나 나는 모름.

청나라는 이제 내 땅이 아니므로 (물론 일본땅도 아니지만) 타이완에게 독립을 종용(?)한다. 그렇게 타이완 민주공화국은 갑자기 독립 국가가 되었다.

중국이 소삭여서 갑자기 독립정부를 구성했던 국회의장과 총통은 독립이 되자마자 재산을 챙겨서 중국 본토로 도망간다. 그렇게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었다. 타이완 주민들은 독립을 위해 (지도자를 잃었음에도) 나름 열심히 저항했지만, 독립국이었던 적이 없던 타이완에게 독립운동이란 동기가 약했다고 본다. 일본의 타이완 선주민(진짜 타이완을 아끼는 사람들)을 타깃으로 하는 토벌방식도 한 몫 하였다. 그렇게 6개월짜리 독립국은 타이완 주민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막을 내리고 일본이 지배하게 된다.

역사상 첫 식민지였던 타이완에게 일본은 공을 많이 들인다. 착취가 분명히 있었지만 제반시설 건축에 공을 상당히 들였다. 더불어 타이완독립에 배후가 되어야 할 상류층들은 6개월의 독립국가 시기에 냉큼 짐싸서 중국으로 도망가버렸다. 가난한 민중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라도, 애국심을 투영시킬 어떠한 국가적 차원의 복지도 가난한 타이완주민에게는 없었기에, 일본 식민지 생활에서 빠르게 순응하는 방법을 택했던 것으로 보인다. 1922년부터는 타이완에 대해서도 일본과 같은 법제도를 적용하면서 동화정책을 폈다. 이러한 동화정책은 법제도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식민지의 ‘일본화’를 꾀하는 정책이었고, 일말의 국가에 의한 보호라도 받고 싶은 민중에게 일본의 유화정책이 목숨걸고 독립운동을 할 만큼 싫지는 않았던 것이다.

지금까지의 특이한 타이완의 역사로 인해 현재까지 타이완 장년층은 일본을 매우 좋아한다(?) 그도 그럴것이 우선, 그동안 타이완을 지배했던 나라(스페인, 네덜란드, 중국)가 많았기 때문에 타이완을 지배하는 나라가 또다시 바뀌었을 뿐 식민지가 된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당시로썬 별로 없었을 것이다. 자유를 보지 못한 노예의 삶같아 불쌍하다. 또한 일본의 타이완 융화정책은 꽤나 성공적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일본은 '대동아공영권'의 구상을 타이완이라는 작은 섬(도시계획엔 '작다'는 점이 매우 중요하다)에서 시도하였고, 말이 자립이지 원조없이 방치했던 청나라의 타이완 정책과는 달리 일본은 타이완을 비교적(?) 거의(절대로 없었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일제수탈과 비교했을때 이야기이다.물론 군수물자 착취와 정신대 문제는 있지만 타이완에겐 익숙) 착취없이 근대화 시켜주었다. 그렇게 일본극우의 정신승리하는데 기여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후설할 중국의 지배에 비해 일본의 지배가 비교적으로 나았기 때문이다.

<일본의 패배(와 동시에 다시 수탈의 시작)>

2차 세계대전에서 히로시마 원폭을 빵! 맞은 일본은 전쟁에서 패망하게 되고, 50년간의 일본의 타이완 통치를 삽시간에 끝낸다. 한편 중국 대륙은 국공내전을 하게 된다. 외관상 전력이 앞서있었기에 자만했던 국민당 군대는 패전을 거듭하다가, 자신의 정부관료와 지지자 그리고 군대를 이끌고 타이완에 물자지원 기지를 세운다. 전쟁에서 얻은 정신적 외상 가득한 군대는 늘 그렇듯이 타이완에 와서도 망나니짓을 자행했고, 그렇게 타이완은 중국에 대한 일말의 동경이 사그라들었다. 당시 타이완 주민 다수는 일본이 나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새로 유입된 중국에서 온 사람들을 타이완 사람들은 '외성(外城)'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외성인'들은 타이완 내에서 입지를 갖추기 위해서라도 타이완 주민들을 군대를 앞세워 진압하게 된다. 명분은 '친일파 제거'와 '공산당 제거'이다. 타이완 주민(본성(本城)인)은 분명히 일본에게 점령 당했을 때도 절대로 호의호식하진 않았다. 식민지 생활이 늘 그렇듯 핍박과 착취의 일상이었다. 그렇다고 타이완의 일제 강점 시기에 모여서 항일독립운동을 벌이는 세력이었기 때문에 절대로 일본 식민지에서 공산당 입지가 컸을리 만무했다. 그렇지만 외성인들은 본성인들을 말도 안되는 명분을 내세워 학살을 가한다. 

국민당 군대는 타이완을 점령하고 학살을 자행하다보니 본국인들은 국민당을 싫어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복붙) 당시 타이완 주민 다수는 일본이 나았다고 생각하게 된다.

1945년 12월 장재스가 이끈 국민당 군대의 국부천대(國府遷臺, 장재스 정부가 전투에서 완전히 패하여 근거지를 중국 본토에서 타이완으로 완전히 옮긴 사건)이후 타이완은 중국인에게 학살을 당했지만 이제 중국인이 되어버린다.

<하나의 중국>

이제 외교권을 들여다보자. 나무위키의 비유를 인용하자면, '대만 인정 안 하고 중국하고 무역하기 vs 중국 인정 안 하고 대만하고 무역하기' 싸움이다. UN상임이사회에서 중화인민공화국(중국대륙)과 중화민국(타이완)의 대표성을 놓고 투표를 하였다. 일개중국(一個中國)의 원칙에서 중국을 대표하는 나라가 어느 나라가 차지 할것이냐를 투표한 것이다. 중공과 국민당은 서로 자신이 중국을 대표해아한다고 주장하는 치킨게임을 벌였고, 국부천대 이후 꾸준히 양국 수교(다른 나라와 외교 동맹을 맺는 것) 누가누가 많이 따내나로 경쟁을 벌였다. 그동안 팽팽했던 경쟁이70년대 초부터 중공 쪽으로 기울어지더니 결국 중화민국(타이완)은 UN에서 가입국 지위를 잃게 되었다. 중화민국 국부가 나라의 실리를 따지지 않고 자존심만 세운 것은 함정. 박정희는 중공이 UN에 단독 가입하자 다시 공산당이 몰려올지 모른다고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서 유신헌법을 통과시킴

<타이완의 다소 늦은 투표권과 아직 요원한 민주주의>

국부천대 이후 타이완은 1987년까지 38년 동안 계엄령이 선포되어 군부에 의해 통지되었고 투표권은 1996년에서야 얻게 되었다.

38년 동안 계엄령 동안 통치방법에대해 설명해 보자면 (과거형임에 주의), 우선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 3권 분립은 있다. 이 3권위에 입법을 비롯한 행정을 국민대회가 한다. 하지만 계엄령 상태이기 때문에 헌법의 기능이 상실되며 이 모든 정치체계는 의미가 없고 군부가 독재한다. 더더군다나 중화민국은 짧은 독립국가 시기 이후에 일본 총독부에 이해 통치를 받았기 때문에 헌법이 없다. 더불어 계엄령 상태에서는 투표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국부를 비롯한 국회의원 등 모든 수뇌부는 종신직이 되었고 다만 사망에 의한 결원이 있을 경우 보궐을 하였다. 당연히 당은 국민당 이외에 구성할 수 없었기에 야당은 존재할 수 없었다.

앞서 기술한 38년의 계엄령 체제의 기형적인 정치체계는 20세기가 되어서야 모든 인사를 퇴직시키는 방법으로 해산하여 재구성 하게 되었다. 당연히(?) 국민대회 의원들은 종신직으로 존치하고 있다. 이유는 중국대륙이 중화민국으로 통일 되었을 때를 대비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우리나라도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기에 이북5도위원회가 있다.

이상 눈물없이는 볼 수 없는 타이완의 역사이다. 타이완의 역사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받은 점, 장기간의 독재, 계엄령에 따른 헌법 무시, 직선제 직후 군부독재 후보 당선, 아슬아슬한 표차로 승리한 야당의 정권 획득 2회, 이후 다시 이루어진 과거 군부독재 세력의 재집권이란 점에서 한국과 너무 유사하다.

최근 해외토픽에서 "타이완 정부가 국민당의 불법적인 재산을 국가로 귀속한다"는 내용을 보았다. 이후 어떤 정치적 맥락이 타이완 역사에 존재하는가 궁금했고 찾아봤더니 동아시아 정치상황이 한국가 너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근혜의 아시아적 가치가 이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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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 섬이라 외적이 침입이 적어 서구열강에게 한방에 깨짐. 스페인 -> 네널란드 순으로 강점함. 서민은 죽을맛.

2. 중국대륙에서 쫓겨온 해적 정성공 일가가 제국주의 열강에게서 타이완을 강탈. 20년 통치. 서민은 죽을맛.

3. 다시 일본이 빼앗음. 전쟁기지로 쓰면서 이것 저것 지어줌. 서민은 죽을맛.

4. 일본이 패전하자 국공내전 일어남. 국부천대로 국민당 군부독재 시작. 38년 해먹음. 서민은 죽을맛.

5. 20세기 들어서야 투표권이 생기지만 독재세력이 당선됨. 서민은 죽을맛.

6. 2016년 총통 선거에서 야당인 민주진보당이 당선됨. 하지만 아직 서민은 죽을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