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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위주 끄적거림/초단편 소설

(단편)썩 괜찮은 집

Shirley Jackson의 소설 [제비뽑기 The lottery] 중 '어머니가 만드셨던 것처럼'을 오마주 하였다.


  계속 오늘 사야할 것을 잊지않으려 노력했다. 확고히 하기위하여 핸드폰 속 노트어플에 적으려던 순간, 잊어버렸다. 까맣게 잊었다. 따로 챙겨놨던 구매리스트도 잃었다. 결국엔 떠오르겠지 하는 마음으로 그냥 집으로 향하기로 했다. 늘 이렇게 치밀하지 못하다고 자신을 힐난한다.

  일부러 집 근처에서 멀찍히 떨어진 자리에 주차한다. 늘 그렇듯 빌라에 주차장은 자리가 4개 뿐이라 경쟁이 치열하다. 한층에 각각 셋 내지는 네 가구씩 모두 5층이다. 다른 사람들 배려차원에서도 일부러 멀찍히 주차한다. 여기는 근처에 골목이 많고 전부 빌라촌이라 굳이 주차장에 주차를 하지 않고 길가에 세워도 널널하다.

  집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더이상은 비밀이 아닌 비밀번호를 눌러 건물의 1층 자동문을 통과해야한다. 번호는 1111. 빈 그릇을 치우러 오는 중국집 알바생도 알고 있을 정도로 공공연한 비밀번호다. 자동문을 통과하고서도 4층까지 걸어 올라가야한다. 다른 집은 널찍한데 비해 이 집은 매우 좁다. 덕분에 가격이 조금 저렴하다. 대한민국의 여느 원룸이 그렇듯이 원래 한 개의 집이던 곳을 두개로 잘라서 각각 세를 주어서 그렇다. 진즉에 시청에 고발하고 싶었지만 귀찮기때문에 관두었다. 화장실에는 환풍기도 없이 작은 창이 고작이고, 방음이 잘 안 되었는지 복도에서 계단 오르는 소음까지 크게 들린다. 부엌은 1평도 안되어 조리기구는 고사하고 냉장고도 겨우 우겨넣었다. 구석구석 곰방이도 조금씩 피어있다. 하지만 5평짜리 작은 방치곤 배란다도 있고 남향이라 낮에는 빛도 잘 들어온다. 물론 낮에 빛을 볼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여기산다면 빨래 말리기는 좋을 것이다. 그래도 이 집에 썩 불만은 없다. 오히려 이 집을 좋아한다. 

  이불이 늘 있던 그 자리에 펴져있다. 아침에 사람이 일어난 그 모습 그대로 이불이 봉긋 솟아 놓여있다. 이불이 개켜있던 적은 몇 번 없다. 보통 이대로 4일 이상은 간다. 그래도 게으른 이불 이 모습 그대로가 좋다. 이불 속에서 얼굴을 뭍고 한숨 들이쉬면 나는 체취가 행복하게 만든다. 소설 '향수'의 주인공이 최고의 향수로 체취를 선택했는지 충분히 공감가는 순간이다.

  집이 작은 만큼 물건이 얼마 없어도 너져분하다. 하지만 이 모습 또한 좋다. 이불 속에서 손만 뻗으면 대부분의 물건에 손이 닿는다. 이불을 반만 덮고 벽에 기대어 책도 읽고 TV도 보고 노트북도 하고 차도 마실 수 있다. 이불 속은 한번 들어가면 나올 필요가 없기에 나오기 힘들다. 게으른 내 삶에 꼭 맞는 집이다. 마음 껏 게을러도 되는 그런 집이다.

  또한 이 집에서는 개도 고양이도 키울 수 없어 너무 좋다. 집주인이 애완동물을 싫어해서 그랬겠지만, 덕분에 건물 전체가 조용하다. 여기 건물에 사는 사람들 모두 집이 그리 크지 않던데, 다들 혼자서 애완동물 없이 잘도 외로움을 견딘다. 애완동물이 있었다면 적잔히 수고스러웠을 나에겐 너무 반가운 일이지만 말이다.

  집은 좁아도 책은 비교적 많은 편이다. (물론 이불 속에서) 책장에 꽃혀있는 책을 하나 집어 들었다. 이전에 한번 읽었던 책이지만 오늘은 마트에서 장봐야 했을 시간만큼 시간이 남았으니 또 읽기로 해본다.

  시간이 4시간이나 지났다.

  해가 뉘였뉘였 해졌으니 이제 내 집으로 돌아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