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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위주 끄적거림/주장하는 글

표절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1. 영감이라는 이름의 허울

- 꿈에서 오는 영감은 오롯이 내 것인가

굳이 프로이트를 끌어들이려는 것은 아니나, 꿈이 개인의 의식과 무관하게 자유롭다는 생각은 잘못되었다. 오늘밤 내가 꾸는 꿈이란 과거의 나에게서 많이, 일주일 전 나에게서 더욱더 많이, 어제의 나에게서 가장 많이 의존한다. 꿈 속에서 뮤즈가 내 귓가에 영감을 훅 불어넣는다는 것은 신이 죽기 전중세 때 환상이다. 꿈 속에서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면, 그것은 기억의 파편을 그러모아 마침맞게 잘 조합했다는 것에 기특해 해야하는 것이지 생각의 존재 그 자체에 감탄해서는 안 된다.

- 산책하면서 느끼는 모든 것은 산책에서 온다

예술가들은 흔히 산책하면서 영감을 얻는다. 산책이 가져다 주는 의미는 환기에 있다. 환기가 영감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에 거부를 표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늘상하는 것을 그치고 새로운 것을 발견할 때, 또는 그러한 의지와 목적을 가졌을 때, 새롭다고 여겨질만 한 것이 보인다.

예술가는 으레 다람쥐 챗바퀴 도는 듯한 일상에서는 도무지 새로운 생각이란 것을 할 수 없다고 여기는 오류를 자주 범한다. 하지만 익숙한 공간을 떠나 야외에서만 환기가 가능하다는 것은 플라시보 이다. 정서적 환기를 가져다 줄 것 같은 행동을 함과 동시에 움직임과는 별개로 환기는 이미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여행을 가기위해 짐을 꾸릴 때 가장 기분 좋은 것과 비슷하다고 본다.

산책 그 차체에 의미부여는 본인이 하는 것이다. 오늘 산책은 어느 코스로 갈까? 산책을 하면서 고개는 어느 쪽을 돌릴까? 산책을 한다는 기분을 어느 시점부터 느끼기 시작할까? 집을 나서면서부터? 아니면 차를 타고 바닷가 해변을 거닐면서부터? 산책을 하면서 예술가가 느끼는 참신함이란 예술가 본인의 다분히 의도적인 선택에 달렸다. 산책으로부터 새로운 것을 보겠다는 의지가 새롭다고 여겨질만한 것을 보게만든다.

더불어 의도적인 시선에서 얻을 수 있는 것 역시 의도적인 상황이다. 차라리 과거 예술가처럼 환각성 약물에 의지하는 것이 훨씬 다양한 무의식을 관찰 할 수 있다고 본다. , 이제 꿈과 산책에서 떠오른 남의 이미지가 어떻게 내 작품으로 승화되는지 말해보겠다.

2. 쉽게 흔히 하는 표절 방법 예시

- 작곡을 예로 들기

https://www.youtube.com/watch?v=i55ndx6haAo (박진영 표절 방법 유투브 자료)

작곡을 할때 흔히 두가지 방법을 쓴다. 멜로디를 만든 다음에 구성음으로 코드를 만드는 방법과 먼저 마음에 드는 참신한 코드를 고르고 거기에 어울리는 구성음으로 멜로디를 만드는 방법. 머릿속에 멜로디가 떠올랐다면 그건 들어본 음이었을 확률이 높다. 대중가요의 멜로디를 허밍(humming)하였을 때 채 원곡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과 같은 실수이다. 톤이 달라지면 다른 곡인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코드를 먼저 만드는 방법은 괜찮을까? 같은 코드로 수백만개의 곡을 쓸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다시 처음의 실수와 같아 진다. 같은 코드를 가지고 있는 기성품을 모방하게 될 것이 뻔하다. 특히 화성학을 알고 있다면 안 봐도 비디오이다. 화성학을 공부할 때 이 코드에는 이 멜로디가 제일 잘 어울리지하는 클리셰를 함께 습득한다. 그 클리셰가 톤만 바뀌어 작품이 될 것이다.

- 디자인을 예로 들기

참신한 디자이너는 사소한 것을 놓치지 않는다.” “면밀한 관찰에서 디자인이 나온다.” “디자이너에게 세상의 모든 것은 모방의 대상이다.” 이런 디자인 세계에서 봄직한 명언들을 묘하게 합쳐 뒤틀리면 그럴듯한 표절동기가 부여된다. 바로 '기존에 존재하는 디자인을 면밀한 관점에서만 바꾸어 내 것으로 만들기'가 그것이다. 흔히 디자인 아이디어를 얻는 방법에 "유명한 디자이너에게서 영감을 받는다", "디자인북을 보고서 영감을 받는다."가 있다. 하지만 이들에게서 엄밀한 의미에서 영감만 받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디까지를 영감으로 허용할 것인가. 경계의 문제에서 디자이너 사이에 합의된 기준은 없다. 유명 디자이너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일예로 한글을 디자인 영역으로 끌어들여 옷을 만들었던 참신한(?) 디자이너가 있다.

더불어 디자인의 세계에서는 한가지 표절묘수가 더 있다. 디자인 표절에서 간과하기 좋은 문제는 떠오른 영감을 어떻게 옮기는 가에 달렸다. 같은 디자인을 표현하는 매체만 바꾸어 얼마든지 다른 작품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마치 앤디워홀의 '마릴린먼로'를 한 조각씩 떼어다가 4개든 6개든 9개든 작품으로 찍어내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원래는 디자이너의 창작활동을 도와준다는 명목하에 만들어진 많은 컴퓨터 프로그램들이 이러한 표절을 거들고 있기도 하다.

- 소설을 예로 들기

사실, 소설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빙 돌아왔다. 표절을 다루기엔 소설만한 것도 없는데, 그 이유는 사실상 표절이 없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롤랑 바르트가 '상호 텍스트성'을 이야기하면서 소설의 포스트모더니즘은 지천에 널부러졌고, 소설에서 표절에 대한 절대적인 면죄부도 주어졌다. 롤랑 바르트가 말하는 '상호 텍스트성'이란, '텍스트'가 무엇으로 구성되어있는가는 전혀 중요하지 않고, 단지 작가가 '텍스트' '텍스트'를 어떻게 연결시키는가에서 독창성이 나온다는 것이다. 바르트에 따르면 기호학적으로 100% 똑같은 글이라도 상황과 맥락에 의해서 전혀 다른 글로 읽혀 질 수 있다. 이 점이 소설 창작에 키포인트이다.

앞서 들었던 예(음악,디자인)보다 최고(最古)적부터 표절되어왔던 것이 소설이다. 당연히 쓰는 기술도 늘었기 때문에 배끼는 기술도 늘었다. 나는 바꾸어쓰기(paraphrasing), 위조(plagiarism), 짜집기(compounding), 쪼개기(slicing) 정도 알고 있지만, 셀 수 없이 많은 기술이 있다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 자기표절도 문제가 된다. 이미 썼던 글을 사골마냥 재탕 삼탕 우려먹는 방법이다. 본인이 썼다고 해도 새롭지 않기에 표절이다. 하지만 보통의 글쟁이는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흔히 소설은 책이지 글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서 자기표절이 나오기 쉽다.

소설 표절의 문제는 본인은 너무도 떳떳할 수 밖에 없다는 것에 있다. 당연한 것이 보다 새로운가보다는 어떻게 구성하는가가 포스트모더니즘의 기조인데, 새로움에 연연하여 본인을 옥죄일 필요가 없다. 또한 바꾸어쓰기 등 숱한 표절 방법들이 사실 모두 표절이라고 보기엔 애매한 구석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선량한 경우 바꾸어 쓰는 것은 그냥 다른 말을 하는 것이 된다. 그것을 수사법이라고 부르고 세련된 글쓰기 형태이다. 더불어 당연히 문학계에서는 베끼던 사람들이 힘있는 사람이 된 사례도 가장 많다. 사회과학적 표절도 무시할 수 없다.

3. 표절하지 않고 창작이 가능한가?

- 어디까지를 표절로 볼 것인가?

산업 기술은 저작권이라는 보다 구체적인 선이 권리를 보장해준다. 그러나 문화의 범주에 포함하는 음악과 소설을 보자. 문화는 특히 상호간의 정반합(正反合)에 기대어 발전하는 법이다. 항간에는 문화를 외계에서 들여오지 않는 이상 지구상의 이미 존재하는 문화를 배재한 채 창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타당한 이야기라고 본다. 문화로 불리는 예술(혹은 기술) 창작물은 표절 시비를 어떤 기준으로 가릴 것인가?

창작자 본인은 신적 영감에 기여하여 세상에 없는 작품을 내놓았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 작품이 반드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우연하게도 나의 정체성(Identity)이 담긴 작품에서 마저도 이미 어딘가에서 존재할 수 있다. 인류는 70억명에 이르지 않는가? 나는 채 인지하지 못했지만 작품을 감상하는 대중에 관점에서는 단순히 표절일 뿐이다.

이처럼 '무지에 의한 표절'이 분명히 있다. 그렇다고 표절의 대부분을 무지에 호소하기엔 표절이너무 많다. 이 표절이 '무지에 의한' 것인지 '의도적'인지의 구분은 창작자 본인이 '베끼겠다'라는 인식이 중요하고 본다. 창작자가 베끼겠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몰랐다'는 핑계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미 그의 작품과 똑같은 작품의 존재를 인지하였고, 주요 구조를 스스로 파악하였으며, 바로 그것을 배낀다는 의도를 갖는 순간, 명백한 표절이다.

- 표절의 판단을 누가 하는가?

한국저작권위원회나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서 중재를 통해 해결하기도 하고, 법원에서 실질적 유사성을 인정받고 처벌을 받는가 하면, 저작권법위반은 친고죄이므로 원저작자 차원에서 표절이 아님을 밝히고 의혹을 씻기도 한다. 정작 법원과 협회에서는 분명한 표절 판단 기준이 없음에도 말이다. 저작권에 관한 판례상 표절을 가르는 기준은 창작적인 부분을 공유하고, 그 부분을 표절하려는 의도가 있으며, 실질적으로 이용한 부분이 판단하기에 유사해야 한다는 법규정이 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고 본다. 실로 애매한 기준이 아닐 수 없다. 더불어 저작권법에 의한 고발은 친고(親告)이다. 표절의 판단은 피해를 입는 오리지널 창작자 본인이 해야한다는 것이다. 창작자가 판단할 일인가 유명 변호사가 판단할 일인가 확답하지 못하겠다.

한편, 실정법적 측면에서 저작권에 대한 대중의 권리란 없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기술 저작권과 비교해보자면, 문화 컨텐츠는 배낀다는 의혹자체가 보다 가멸차다. 표절가수 혹은 표절 작가라는 낙인이 찍히면 오래토록 꼬리표로 남는다. 어쩌면 이름으로 먹고 사는 예술가의 특성상 당연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표절시비로 흥분한 대중은 법관보다 현명한가? 과연 표절에 대한 시시비비가 공평한가는 자처하더라도, 표절이 유명인에 비해 무명에게 보다 가혹한 의미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 좋은 창작자로써의 자세

사실상 표절을 마음 먹은 사람은 어떻게든 표절을 해내고야 만다. 표절은 표절자가 하는 것이다. 표절이 없다는 것은 표절자가 더이상 표절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주체가 존재를 결정한다. 때문에 표절에 대한 소신있는 자기 철학을 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 표절로 인해서 얻는 나의 이익이 과연 정당한가, 사회에 보탬이 되는가, 표절시비로 인한 개인적 또는 사회적 비용이 얼마나 드는가. 반드시 생각해봐야 한다. 본인 스스로의 어디까지 모방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객관적이고 통념적인 관점도 필요하다. 도덕적인 이유로 말이다.

창작자로서의 양심을 갖추는 방법은 무엇보다 자신을 회의하는 것에 있다. 혹여 표절에 대한 의심이 조금이라도 들어 양심상 꺼려지는 것은 원작자를 찾으려는 노력을 들여서 확인해야 한다. 설령 독창성을 판단하는 작업이 창작 작업만큼 번거로운 일이겠지만 해야한다. 창작자의 주관적 인식으로는 '창작'이지만, 롤랑 바르트의 주장처럼 '이 땅에 새로운 것은 없다'는 의심이 필요하다. 철저한 자기반성과 크로스체크가 '의도적인 표절' '무지에 의한 표절'을 동시에 막을 수 있다.

창의적인 창작자가 되기 위해서는 과거에 연연해야 한다. 역사를 배운다는 것은 과거의 참신성을 복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는 그 참신성을 반복하지 않기 위함이다. 자신의 영감을 늘 의심하라. 자신이 남들과 다르게 특별히 창의적인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는 순간, 그는 가장 진부한 사람이 되어 다른 창의적인 작업에 걸림돌이 되고 있을 게 분명하다. 한편 흔해 빠진 이야기라 더이상 거론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 주제가 (마치 점도 높은 꿀단지 속으로 빠진 숟가락을 찾는 작업처럼) 사람들이 가장 필요한 작업일 수 있다.

이렇게 이야기해도 표절이 돈이 되면 하겠지만 서도...